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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의 리뷰

홍승찬, 서희태의 위대한 사람들의 삶과 음악사 2강 리뷰 본문

온라인강의 리뷰

홍승찬, 서희태의 위대한 사람들의 삶과 음악사 2강 리뷰

블레어 2024. 4. 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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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어머니, 헨델

 

바로크 시대에 헨델의 곡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너무 쉬웠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기 떄문에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린 듯 하다. 

헨델의 음악은 감성적이고 선율적이고 화성적이고 여성적이었다고 볼 수 있어서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렸을 것이다. 헨델과 바흐는 살아 생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헨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을 했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바로크 시대, 고전음악주의 시대에는 영국에는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작곡가가 거의 없었다.

헨델은 정말 쿨한 성격을 가졌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헨델과 바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바흐는 굉장히 신실한 신자와 같은 삶을 살았고, 헨델은 굉장히 화려한 삶을 살았다.

바흐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헨델은 의사 아버지한테 테어나서 음악가 직업이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음악 하고싶다는 부탁을 계속 했고 헨델의 어머니는 헨델의 생일 날, 클라이버코드 악기를 사줬다.

헨델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다락방에서 악기를 연주했고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헨델이 다락방에서 피아노를 열중해서 치는 것을 보고 아버지도 허락을 해줬다고한다.

바흐와 헨델은 결혼관도 달랐다.

바흐는 두 번의 결혼을 했고 20명의 자녀를 낳았고 헨델은 결혼을 안했던 독신주의자였다.

헨델은 애주가였고 애연가였고 대식가였다.

헨델은 경건하고 똑똑한 독일의 음악과 어울리지않았고 음악적 스타일이 달랐기 떄문에 헨델이 독일을 떠나고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영국은 경제의 중심지라 돈이 많았고 헨델이 영국에 가서 자기 음악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오페라 <리날도>에는 너무 유명한 노래가 있었다.

1711년 영국에서 처음 공연됐고 큰 성공을 거두게된다.

그래서 영국으로 귀화하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헨델이 영국으로 간 세번째 동기는 헨델이 하노버 지방의 음악가였는데 게오르그 선제후로부터 휴가를 얻게되고 영국으로 갔던 것이다.

오페라를 상영하고 많은 찬사를 받으니까 영국으로 귀화했던 것 같다.

<파리넬리>는 당시 카스트라토의 전통을 보여줬던 영화였다.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에 대한 내용을 다룬 영화이다.

성인 남자가 될 때 남자 아이들은 변성기가 오게되는데 변성기가 오기 전에 거세를 하게되면 목소리가 변하지않는다.

성대도 길어지면 소리가 떨어져서 저음이 되는데 거세를 하게되면 성대가 길어지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게 카스트라토인데 이게 생긴 이유는 교황이 있는 성 바티칸테 가면 시스티나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 여성들이 노래를 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래서 남자 어린이들이 그 파트를 맡아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큰 도시마다 한 가지씩 있는게 소년합창단이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의 일원으로서 유명했던 사람은 하이든과 슈베르트였다.

이 아이들도 변성기를 거치면 목소리가 달라지니까 거세를 해서 카스트라토를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카스트라토의 최대 수출국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녀를 카스트라토로 만들면 경제적 지위가 올라가기 떄문에 아이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었던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헨델 음악의 특징은 아주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있다.

두 번째는 기존의 틀에 구속되지 않는다.

굉장히 진보적이었다.

헨델은 만인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서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헨델은 하노버 왕조의 음악가로 활동을 하다 영국으로 휴가를 간 이후, 영국으로 귀화를 했는데 오페라 극장을 운영할만큼

대단한 작곡가가 되었다.

1714년 해에는 앤 여왕이 사망하고나서 하노버 왕조가 그 뒤를 잇게 된다.

하노버 왕조의 선제후는 게오르그 선제후였다.

게오르그 선제후는 조지 1세의 이름으로 즉위를 했고 그 왕조가 하노버 왕조였다.

지금의 윈저 왕조가 탄생하기 전까지 영국을 통치하는데 헨델을 아끼던 동료들이 헨델에게 묘안을 냈다.

게오르그 선제후가 뱃놀이를 즐기던 때가 있었다.

그 옆으로 관현악단을 실은 배가 있었는데 이 음악을 헨델이 작곡했다.

조지 1세는 이 음악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당장 불러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헨델이었다.

그래서 조지 1세는 헨델을 용서했고 헨델은 그 뒤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1946년 봄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다 평화조약을 맺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에서 불꽃놀이를 열었는데 그걸 축하하기 위해 이 음악이 작곡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왕실이나 귀족들이나 교회에서 주로 듣는 음악이었는데 이 음악이 대중들의 축제에서 처음 연주됐던 바로크 음악이었다.

헨델의 오페라극장이 파산된 후, 헨델은 뇌출혈을 일으켜서 반신불수가 되고 실명까지 당한다.

4년이 지나고 헨델은 오라토리아 작곡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헨델이 어느 날 산책을 다녀왔는데 집에 소포꾸러미가 있었고 이 소포는 찰스 제넨스가 보낸 것이었다.

그가 보낸 편지에는 이 가사를 써서 불멸의 작품을 만들라며 메시아의 원고가 있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읽고 무아지경에 빠졌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이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메시아는 52곡짜리 엄청난 작품인데 24일 만에 작품을 끝내게된다.

헨델은 이 작품을 끝내고 나서 하늘이 열리고 위대한 신의 모습이 보였다고 말했다.

헨델은 화려한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세속을 떠나서 경건한 교회 음악을 작곡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헨델은 74세의 나이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있다.

헨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기복이 심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바흐와 비발디에 비해서 훨씬 행복한 말년을 보낸 사람이었다.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인 헨델이 결혼했다면 그 자녀로 음악이 태어난 느낌이다.

리뷰

 

이 강의를 통해 헨델의 삶과 음악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헨델이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과 조국 독일의 음악적인 스타일이 달라서 과감히 영국에서의 귀화를 결정한 것이 용기있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헨델이 말년까지 온전히 음악에 자신의 열정을 쏟았던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나이가 들고 나서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후원했었다는 이야기가 좋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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