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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베이천 <정사 삼국지> 6강 리뷰 본문

온라인강의 리뷰

팡베이천 <정사 삼국지> 6강 리뷰

블레어 2024. 8. 1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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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하) 강대국은 왜 멸망했나

 

조조는 자신의 강적부터 제거한다.

가장 가까운 강적은 바로 여포였다.

조조는 줄곧 여포와 겨루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여포를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군웅 할거를 이끌었던 원소를 제거한다.

그렇게 북쪽을 거의 장악한 다음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남하한다.

당시 그 곳에선 유비도 있었다.

당시 유비는 이미 제갈량을 데리고 있었다.

손권도 전쟁을 준비하게된다.

양쯕은 적벽에서 전쟁을 치뤘고 결국 조조가 참패한다.

적벽대전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전투이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 북쪽으로 물러났다.

조조, 손권, 유비 이렇게 세 세력의 형태가 구체화된다.

훗날 조조는 북부로 돌아간 이후, 북부에 남아있는 소수의 대항 세력을 제거하고 위왕 자리에 오른다.

조조가 누리는 대우도 황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삼국 중 조위 왕조가 가장 먼저 세워진다.

조비가 재위한 기간은 몇 년 안된다.

40세에 죽었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정치적,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군대와 국가를 총괄하는 제도에서 유명한 정치 개혁인 관료계급제도의 개혁이 있었다.

인재를 9등급으로 나누는 구품중정제를 도입했다.

품은 품계, 등급을 의미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방법이 편하고 구분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9품 제도는 관료의 등급에도 사용됐다.

위문제의 중요한 업적이 또 있는데 서역으로 가는 길을 다시 개통한 것이다.

위문제는 문화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비의 아들 위명제는 꽤 능력이 있었다.

나라를 안정시켰다.

 

위명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문란하고 방탕한 사생활을 들 수 있다.

궁궐을 짓는데 막대한 돈을 쓰고 수많은 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궁궐엔 1000명의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위명제는 궁정에서 하루종일 미녀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향략에 취해 살았다.

그는 첫째, 조위 내부의 위기를 관찰하지 못했다.

멸망의 씨앗이 위명제가 재위하던 시절에 뿌려진 것이다.

두 번쨰는 위명제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재위 기간이 짧았고 사마씩 가문의 정계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세 번쨰는 위명제가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위명제의 황후와 후궁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결국 아들은 낳지 못했다.

아들이 없는게 왜 부정적인 결과일까?

위명제가 죽은 뒤 조위 왕조에선 3명의 젊은 황제만이 권력을 잡는다.

위명제에게 아들이 없다보니 조씨 가문에서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여 후계자로 세워야했다.

위명제가 죽고나서 세 명의 어린 황제가 연달아 즉위했고 자리를 쟁탈하려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265년에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서진 왕조를 세우고 조위 정권은 여기서 끝이 난다.

리뷰

 

위명제의 업적들도 있었지만 방탕한 사생홞 문제로 내부의 위기를 관찰하지 못했고

건강 악화에 자손까지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강대국이었던 조우 정권이 위명제로 인해 막을 내린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왕이 되는지가

나라의 존폐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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